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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17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노태우 당선카테고리 없음 2025. 12. 17. 23:39반응형
1987년 12월 16일(투표일 기준, 개표는 12월 17일)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정치 제도의 규칙”이 바뀐 뒤, 국민이 직접 그 규칙을 통해 권력을 선택한 날로 기록된다. 이날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1987년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이후 처음 치러진 선거였다. 결과적으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고, 선거 과정과 결과는 이후 한국 정치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이 글은 1987년 대선이 어떤 배경에서 치러졌고, 어떤 구도로 진행되었으며, 왜 “역사적 분기점”으로 평가되는지 사실관계에 근거해 정리한다. 특정 정치적 입장을 설득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사건의 맥락과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역사 정리 글이다.
1. 왜 1987년 대선이 ‘전환점’인가?
1987년 대선의 핵심은 “누가 당선됐는가”만이 아니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선거가 제도적으로 복원되었고, 그 제도가 실제 선거로 실행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의미로 남는다. 한국 현대정치는 한동안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는 방식(간선제)이 이어졌고, 이에 대한 사회적 반발과 민주화 요구가 누적되었다. 1987년은 그 요구가 한꺼번에 분출하며 제도 변화로 연결된 해였다.
2. 1987년 대통령 선거의 배경: 민주화 요구의 확산과 6월 항쟁
1) 간선제에 대한 반발과 민주화 요구
1980년대 중반 한국 사회에서는 대통령 선출 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졌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불린 간접선거제(간선제) 방식은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고, 직선제 도입 요구는 점점 확대되었다.
2) 1987년의 주요 사건들: 박종철 사건과 이한열 열사
1987년 1월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사회적 충격을 주었고, 민주화 요구가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6월 시기에는 시위 과정에서 이한열 열사가 희생되며 여론이 급격히 움직였다. 이러한 흐름은 전국적 규모의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고, 일반적으로 6월 민주항쟁으로 정리된다.
3) 6·29 선언과 제도 변화(직선제 개헌)
6월 항쟁 이후, 1987년 6월 29일 당시 여당 대선 후보였던 노태우가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직선제 개헌 수용과 기본권 확대 등 정치 제도 전환을 포함한 내용이 담겼다. 이후 헌법이 개정되면서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체제가 마련되었고, 그 결과 1987년 12월 16일 직선제 대선이 실시되었다. 정리하면, 1987년 대선은 “선거 일정이 도래해서 치른 선거”가 아니라, 민주화 요구 → 제도 개정 → 직선제 선거라는 흐름으로 성립한 선거였다.
3. 제13대 대통령 선거의 구도: ‘1노 3김’ 경쟁 구도
1987년 제13대 대선은 흔히 ‘1노 3김’ 구도로 불린다. 주요 후보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 노태우(민주정의당)
- 김영삼(통일민주당)
- 김대중(평화민주당)
- 김종필(신민주공화당)
직선제 개헌 이후 처음 치러진 선거였기 때문에 국민적 관심이 매우 컸다. 또한 후보들이 모두 정치적으로 상징성이 큰 인물들이었고, 선거 결과가 향후 정치 질서를 결정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했다.

후보자 명부
4. 선거 결과: 노태우 당선과 득표 분산의 영향
선거 결과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득표율은 일반적으로 노태우 약 36.64%, 김영삼 약 28.03%, 김대중 약 27.04%, 김종필 8.06%로 정리된다.

개표현황 이 선거에서 자주 언급되는 핵심 요인은 야권 표의 분산이다.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가 단일화하지 못하고 각각 출마하면서, 야권 지지층의 표가 갈라졌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1위 득표율이 50%에 훨씬 못 미치더라도 최다 득표자가 당선되는 구조에서 노태우가 승리했다. 이 대목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한 “정치 공방” 때문이 아니다. 1987년 대선은 이후 한국 정치에서 선거 전략, 후보 단일화, 지역 구도 등 다양한 주제를 설명할 때 반복적으로 참조되는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1987년 대선은 결과 자체와 함께 정치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 선거로 남았다.
5. 노태우 당선에 대한 역사적 평가: 비판과 의의가 함께 존재
노태우의 당선은 다양한 평가를 동반한다.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는 범위에서 정리하면, 큰 흐름은 다음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한다.
1) 비판의 지점: ‘정권의 연속성’ 논란
노태우는 당시 민주정의당 후보로, 전두환 정권의 실질적 후계자로 평가되었다.따라서 "정권의 연속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는 당시 정치 지형과 권력 구조를 고려할 때 자연스럽게 뒤따른 평가 중 하나였다.
2) 의의의 지점: 직선제의 실행과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대선은 결과와 별개로 민주주의 제도의 틀이 한 단계 전진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 대통령 직선제의 제도적 정착(첫 실행)
- 정치 갈등이 선거라는 절차 속에서 경쟁하며 표출되는 구조의 강화
- 이후 한국 정치가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중요한 이정표 제공
특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첫 선거가 실제로 치러졌고, 그 결과에 따라 권력이 이양되는 체계가 작동했다”는 점은, 민주주의 제도가 ‘문서’가 아니라 ‘현실’로 구현되는 과정이었다.
6. 1987년 대선 이후의 흐름: 다음 정부로 이어지는 정치 변화
1987년 대선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 선거 결과는 이후 정부 운영과 정치 질서 재편으로 연결되었다.
- 노태우는 당선 이후 대통령으로 취임해 임기를 수행했다(재임 기간은 1988~1993년).
- 1990년에는 이른바 3당 합당이 이루어져 정당 체계가 크게 재편되었다.
-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이 당선되며, 이후 “문민정부” 출범으로 이어진다.
즉, 1987년 대선은 단독 사건이 아니라,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정치 재편의 출발점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평가”보다 “연결 구조”다. 1987년 대선은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가 어떤 방식으로 권력 구조를 재편해 나갔는지 보여주는 첫 장면에 해당한다.
7. 한눈에 정리: 시험·교양용 핵심 요약
-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실시
- 직선제 개헌 이후 첫 대선
- 주요 후보 구도: 1노 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 결과: 노태우 당선(야권 표 분산이 결과에 큰 영향)
- 의의: 직선제 선거의 현실화, 민주주의 제도의 작동 확인, 이후 정치 변화의 출발점
8. 자주 묻는 질문(FAQ)
Q1. 1987년 대선이 “처음으로 국민이 대통령을 뽑은 선거”인가?
대한민국 역사 전체에서 최초의 직선제 선거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1987년 개헌으로 직선제가 부활한 뒤 그 제도 아래 처음 실시된 대선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Q2. 왜 ‘야권 분열’이 그렇게 중요하게 언급되는가?
1987년 대선은 다자 구도에서 최다 득표자가 당선되는 방식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준 사례로 남았다. 이후 한국 정치에서 후보 단일화 논의가 반복되는 배경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한다.
Q3. 6·29 선언이 왜 결정적이었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제도 변화의 출발점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1987년 12월 16일 선거를 가능하게 만든 정치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9. 마무리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노태우 당선”이라는 결과만으로 단순화하기 어렵다. 그 이전에 6월 항쟁과 6·29 선언, 개헌을 거쳐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체제가 실제로 작동한 첫 장면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날은 민주화의 과정이 제도 변화로 연결되고, 그 제도가 선거라는 절차 속에서 현실로 실행된 날로 기억된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정치의 규칙이 바뀌고, 그 규칙이 처음으로 현실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날”이라는 점에서 1987년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분기점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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